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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날들

by rhodia 2020. 2. 4.

유난히 쌀쌀한 아침이다. 마스크 틈새로 스멀스멀 오르는 입김이 안경알을 뿌옇게 한다. 밖으로 나오니 따뜻해진 햇볕을 못살게 굴기라도 하는 듯 바람이 차고 세다. 청바지 안으로 관절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진다. 몸은 정직하다. 요즘은 슬럼프가 무엇인지 처음으로 체감하는 중이다. 의욕은 어렵게 생기고 빠르게 사라진다. 불안과 초조함은 3분 짜리 가십에 자꾸 나를 던져 넣는다. 원래는 긴 활주로였고 잘 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바탕 모래바람과 폭풍우가 일었고 출발과 끝, 과정이 모두 엉망이 된 느낌이다. 삶은 작은 점 하나를 찍는 과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 1차원 평면의 삶이 느닷없이 3차원으로 바뀐 것 같다. 지금까지 1차원을 점을 찍으며 2차원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오른손잡이이니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잘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더 위로 가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삶이 3차원으로 보이자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용기는 지향점이 있을 때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앞으로 가는 것이 2차원 그래프의 오른쪽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바라보고 있는 곳이 앞이었다. 

 

삶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마음은 나약해지지만, 정신은 또렷해진다. 물러설 곳이 줄어든다는 공포는 선택지도 함께 줄어든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틀리지 않았다. 시간은 나를 밀어내며 남아있던 선택지마저 차례차례 없애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몇 가지 크고 작은 선택은 다시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는다. 머피의 법칙으로 설명하기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 예쁘게 꾸며도 현상은 바뀌지 않는다. 줄어든 선택지가 하찮아 보인다. 선택 여부가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다. 기댓값이 작다. 다시 무력감이 공기를 감싼다. 

 

너절하게 늘어진 돌 벼락에 나무줄기가 늘어져 있다. 처량하다 싶어 들어다보다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끝까지 내려가도 아무것도 없을 거야" 

시키지도 않았는데 괜한 참견이다. 살짝 찢어진 자전거 안장이 처연하다. 그런저런 생각에 시간을 낭비하다가도 햇볕은 여전히 따뜻하다. 나는 햇볕을 좋아한다. 이 세상에 온도가 없어 춥고 더움을 느낄 수 없더라도 나는 그 빛이 주는 색온도가 달라졌음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의 햇볕은 묘한 행복감을 준다. 갑자기 마음이 동한다. 삶이 3차원이고 어디든 앞이 될 수 있다면 지금 뭔가를 시작하는 것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뭔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것이 내 마음을 따르는 것이라면 여기가 가장 적절하고 빠른 출발 지점이 될 수 있겠다 싶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마음이 웃기긴 하다.

 

스스로 주체가 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마음대로"라는 말이 있다.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온전히 맡길 때 우리는 "마음대로 해"라고 하지 않던가. 누구 하게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 내 마음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몸이 저린 듯한 기분이 든다.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을 먹기 위해 외투를 걸치고 식당으로 간다. 이 짧은 길조차 도 추위가 야속하고, 바람이 좀 덜 불었으면 하고, 그늘을 피하고 싶고, 무빙워크 같은 것이 나를 태워다 날랐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은 고단하고 쉽게 지친다.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적어도 삶이 3차원 이상으로 이뤄져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종일 가시질 않는다.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다. 글씨를 잘 쓰고 싶고, 모두에게 친절해지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따뜻하게 가족을 안아 주고 싶고 많은 일에 정성을 쏟고 싶다. 열심히 먹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싶다. 삶의 어딘가를 정하고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과정을 감사하게 살고 싶다. 큰 기쁨을 주는 대부분은 불확실성을 가진다. 불확실성은 불안이기도 하지만 기쁨과 슬픔이기도 하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내 마음뿐이라면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는 일관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며 하루하루 대응하고 직면하는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이 노래가 끊기기 전에 다음 노래를 찾았다. 노래가 끊기지 않고 계속 나오길 바랐다. 그러는 사이 좋아하는 노래는 끝이 난다.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지금 나오는 노래를 충분히 즐기고 싶다. 그러면 그다음은 무엇이라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선택의 과정은 어떤가. 그것조차도 큰 기쁨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침대로 책을 들고 가는 습관도 버릴 것이다. 따뜻한 이불과 온기를 온전히 느낄 것이다. 매일 이런 밤을 맞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싶다.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듣고, 바람을 느끼고 싶다.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목적지를 향해 갈 땐 당연히 거기 있어야 했던 가장 기본적인 것들에 눈길을 주고 싶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감사함을 쌓고 싶다. 문득 마음이 참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쓸쓸하고 기운 없던 발걸음에 힘이 들어간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에서 긴장된 근육이 느껴진다. 맑은 정신을 가지고 호의를 베푸는 인간이 되고 싶다.

 

너도 열심히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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