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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먼 이슈

by rhodia 2019. 9. 26.

에스콰이어 2018년 2월호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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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신기주 편집장은 THIS WAY IN을 통해 다시 한번 자기고백을 했다. 에스콰이어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안, 밖의 시선을 용기 있게 들여다본 것이다.  나는 이 점이 끌렸다. 인정한다는 것은 사실 여부를 확인해주는 것을 넘어 책임을 나누고 고통을 분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정은 생각보다, 그리고 보기보다 어렵다.

 

2월호를 ‘우먼 이슈’로 만들겠다는 다짐은 이런 인정의 다름이 아니다. 지난 호가 에스콰이어 내부 시선의 고백이었다면 이번 호는 에스콰이어 외부 시선의 고백이다. 남성지 포지션의 잡지가 한순간에 여성의 무엇을 다루고 논하는 것은 정체성과 품질을 한꺼번에 흔드는 위험한 모험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주 편집장의 이런 결정은 행동이 생각보다 비싸다는 진실를 날것으로 실천한 에스콰이어 팀의 다짐이 아니었을까.

 


지난 1월호에는 배우 정우성의 인터뷰를 비롯, 인상 깊은 기획과 글이 너무 많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정기구독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나 같은 기대를 가지고 펼친 2월호 배우 손예진의 인터뷰는 그렇지 못했다. 배우 손예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배우이니까 말이다. 아마 앞서 나오던 이질적 광고에서부터 내 마음이 틀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질문이 너무 가볍지 않나, 인터뷰어로 새내기를 배정한 것 아닌가, 편집장에 의해 강제 할당(?)된 아이템의 한계인가, 행동을 보여주려는 생색내기 정도의 기획이라 그런가 하는, 어찌 보면 밤낮으로 쓰고 찢고 쓰고 찢은 편집자를 모욕하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평소에 좋아하던 배우 김옥빈의 인터뷰도 가십을 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어지는 류승룡의 인터뷰에서 그 답이 어느 정도 풀렸다. 문제는 나에게 있음을. 어쩌면 신기주 편집장은 이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반대편의 시선을 강요받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무의식은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 순간 반대편에 꼿꼿이 서 있었다. 주도당하는 기분은 이런 거였다. 여성이 사회에서 느끼는 것은 박탈감은 생각보다 더 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환경에서 그들 스스로 조차도 알아채지 못하고 수긍해버리는 것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기 때문에. 진정 무섭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일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 우선과 배려받아야 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 아니다. 여성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며 불합리한 차별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려는 포괄적 인권 운동이다. 지금은 상대적 약자였던 여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기울어진 인식의 운동장이 평평해진다고 느낄 때쯤이면 우리는 여성이 아닌 인간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이를 실천해나가는 과정은 여러 잡음과 고통의 연속이다. 인간은 생각만큼 객관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 않으며 모든 사안은 누군가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대하던 결과를 얻는 것은 사실 상 거의 불가능하다. “~처럼 보인다”라는 문구는 객관화된 것처럼 포장된 문장의 마무리를 통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일방의 권리를 주장하는 효과적 방법이다. 이 주장은 힘이 센 쪽이 주도권을 가진다. 반대편의 다른 누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와 운동을 악용한다. 이 모든 게 뒤섞여 짜증과 불신과 의심과 무관심을 낳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의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가 이상적이진 않아도 진보하고 있으며 짧지만 지속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며 살아온 이 땅의 여성과 남성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문제와 화두가 다른 어떤 나라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하면 그런 사실은 더욱 명백해진다.

 

앞선 문장에서 여성과 남성의 순서는 의도적인 것이다. 순식간에 “어 순서가 바뀐 것 아니야”하는 생각이 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북남’이라든지, ‘일한’, ‘미한’과 같이 어색함을 느끼는 단어 조합이 있다. 별것 아닌 단어와 문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글과 말, 그것을 구성하는 단어와 문장은 마음의 얼굴이며 관념의 덩어리다.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이 암묵적 합의로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박은정의 이유>라는 글을 읽고 있다. 아직 에스콰이어 2018년 2월호는 절반이 남았다. 시선과 관념을 두고 에스콰이어 팀과 주도권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난 후 이번 호를 다시 들춰 볼 때 나는 어떤 시선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모든 인정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신기주 편집장이 THIS WAY IN을 통해 했던 고백에서 나는 그런 인식을 봤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그런 인식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은 불편하고 때론 짜증스럽다. 일상이 깨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진보가 싫어 보수로 돌아서는 이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친 후 봄이 온다는 것을.

 

 

이 글은 브런치에서 이곳으로 블로그를 이사하면서 옮겨진 글이며 2018년 3월 11일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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