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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여행, 새로운 발견

by 마켓펀치 2019.09.26

예행 연습이 없는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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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펼친 지평선이 보인다.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내리쬐는 태양, 그 아래서 잠시 눈을 감는다. 나는 어느새 선분홍 빛 아가미 안으로 들어와 있다. 탯줄을 끊어내기 전의 안락한 엄마 품과 행복의 감정을 기억해낸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여행이란 단어는 그 존재만으로도 행복과 설렘을 만들어내는 묘함이 있다.

 

반복과 지속, 누적만 피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의 걱정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제의 실수, 오늘의 슬픔이 내일의 무엇으로 쌓이지 않고, 우연히 살짝 스친 송곳이 단지 우연일 뿐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너덜 해진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끊임없이 공허한 구멍을 메우는 반복의 지속이다. 애초에 인간의 삶에서 말끔한 것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 일상에서 도려진 걱정과 낯선 세상의 생경함은 순수해진 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는 착각마저 준다. 고민 고민 끝에 챙겨 나온 몇 개의 여행 가방은 소유의 욕심으로부터 – 적어도 물리적으로 – 선을 그었다는 증거다. 이제부터 모든 것은 시작이며, 어떤 경험도 새로울 것이다. 차곡차곡 쌓아왔던 비난과 명성도 그곳엔 없다. 비로소 자유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누구나 한 번쯤 써봤지만 유치와 진부함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이 문장의 진가를 알게 되는 건 아무 생각 없이도 무엇이든 해내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다. 매일 타는 지하철과 버스, 능숙한 일솜씨, 수십 개의 비밀번호쯤은 자연스럽게 해제하는 능력은 실로 놀랍고 효율적 삶에 필수적이지만, 무기력과 절망의 시작이기도 하다. 일상으로 통칭되는 하루와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얇은 알록달록 셀로판지를 차례로 겹쳐보며 행복을 느끼다가도, 반복과 지속과 누적의 속성이 더해진 무지개의 합이 검정이 되는 모습을 보며 좌절한다.

“너 답지 않아”

나의 선호와 기분, 예측되는 행동과 감정 변화를 너무도 잘 아는 탓에 “너 답지 않은데”라고 말해주는 친구의 위로가 괜스레 짜증스러울 때가 있다. 이제까지 나를 한껏 꾸며주던 형용사가 갑자기 칸막이를 닫고 사방에서 밀어댄다. 그때가 – 나를 찾는 – 여행을 떠날 때다. 

 

여행은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끊임없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그 책임도 온전히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 돌발 상황에서 반응하고 행동하는 내 모습은 그동안 내가 알던 내가 아닐 것이다. 켜켜이 쌓여 나를 옥죄던 이미지와 프레임은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다 결국 박살 나고 말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내 안에 정말 많은 내가 있으며, 그동안 보고, 듣고, 말하던 ‘한정’된 환경이 골라낸 단 하나의 ‘나’를 전부로 믿어왔던 시절이 애송이 같단 생각도 들 것이다.

 

여행은 예행연습이 없는 인간의 삶에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기회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과 스스로 설정한 기간이란 안전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보물섬 지도는 지금 당신 손에 있다. 이제 모든 것은 당신에게 달렸다.

 

 

이 글은 브런치에서 이곳으로 블로그를 이사하면서 옮겨진 글이며 2017년 2월 15일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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